Vacation


뜨개를 시작하고 뜨개에 너무 파묻혀 살았다.

살은 20kg 넘게 찌고 관절은 움직이지 않는다.

개 알레르기로 시작된 비염과 천식은 고질병이 되어 버렸고 머그컵 하나라도 씻으려고 싱크대 앞에 서면 허벅지가 불타오른다.

낯선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지 않아 사회성은 제로에 가까워지고 성격도 괴팍해졌다.

예쁘게 꾸미던 홈스윗홈은 털실과 먼지로 가득한 쓰레기 집구석이 되어 버렸고 각종 공과금은 잘 내고 있는지 밀리는지 도대체 나는 사회 구성원이 맞는지 도태된 인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뜨개머리앤에서 미팅 제안이 왔다.

평소라면 온라인 미팅만을 고집했을 테지만 어쩌면 지금이 내가 폐인으로 가는 길에서 유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부전역에서 양평역까지는 3시간 30분.

번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무척 겁이 났지만 늘 그렇듯이 막상 부딪혀보면 이 세상은 내 발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평의 첫날은 뜨개 친구들과 보내기로 했다.

숲닛츠를 같이 시작한 태희, 숲닛츠의 샘플을 열심히 떠주는 미옥 언니, 머글보다 더 머글처럼 보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타쿠, 그리고 나.

우리는 그동안 꽤 여러 번 만났지만 늘 내가 있는 아랫지방에서 만났다. 드디어 이번엔 내가 윗지방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뜨개를 하다 만났지만 만나서 뜨개를 한 적은 없다.

오직 먹고 말하고 자고.



나는 어느 그룹에 속하더라도 늘 고기를 굽는다.

고기를 잘 굽는다는 자부심은 없지만 젤 맛있게 구워진 고기는 반드시 내 입으로 집어넣겠다는 철학은 있다.

사람들은 내가 고기를 못 챙겨 먹는다고 오해한다. 다행이다.



고기보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딸기(와 요거트).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먹고 말하고 자고,

다음 날 우리는 멋진 식당을 찾았다.


히든 어드레스.


사장님이 밭에서 기른 채소를 따다 샐러드를 만들어 주신다.

우리의 식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베이킹 수업이 있다며 가게를 비워버리신다.

도시에서 얌전했던 강아지는 이 곳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예의 없는 행복한 강아지가 되었다.

모든 것이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크로셰룩 가방, 숲닛츠의 따뜻한 손뜨개 도서 수록작

크로셰룩 가방, 숲닛츠의 따뜻한 손뜨개 도서 수록작


아 너무 좋아.

난 정말이지 시골 체질인가봐.

좋아도 좋다고 말 못 하는 경상도 여자는 이 곳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가 너무 낯설지만 이내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한다.



그림같았던 뜨가 방문.

뜨가는 뜨앤에서 운영하는 얀샵이다.

뜨앤


뚠뚠한 양길이가 우리를 반겨준다.

예전에 길냥이에게 까불다가 냥펀치를 얻어맞았던 달자는 이번에는 함부로 냥님에게 까불지 않는다.



우리끼리 짧은 회의도 해본다.

안건: 예쁜 뜨개실과 향기로운 꽃이 가득한 뜨가에 몰래 숨어 살 수 있는 방법.

아무래도 달자 때문에 실패할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미옥 언니는 로완 키드 실크 헤이즈로 뜬 숄에 꽂혀버렸다.

하늘하늘 아름다워 꽂힐만하다.


숄인데 단추가 달려 있어서 볼레로처럼, 또 조끼처럼 입을 수도 있다.



타래상점도 방문했다.

타래상점 실을 그렇게 많이 썼는데 첫 방문이라니!

역시나 이쁜 것들 천지삐까리!!

타래상점



아니 이게 뭐예요. 이 귀여운 것 뭐예요.

Grey level knitter 님의 빅버드 베스트 샘플 사이즈. 너무 귀여워서 흥분한 나머지 초점이 나가버린…


아이 헤이트 케이블 카디건 by 숲닛츠


타래상점 사장님께서 내 샘플들을 디피해주셨는데 내 것들을 소개하려니 부끄럽다.. 

털실타래 봄호에 수록된 루즈 케이블 스웨터 by 숲닛츠


하하하하

부끄부끄


드디어 내꺼 아닌... 그레이 레벨 니터님의 요트클럽베스트!


ㅋㅋㅋㅋㅋ 포즈가 좀 웃기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이쁜 1월 풀오버 by 리틀웜띵스!


타래상점에서 득템한 고오급 실! 너무 아름다워!



니트하임과 누가바닛츠도 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에 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히키코모리가 아닌 인싸로 거듭날 예정이기에 조만간 또 기회가 오겠지.

빨리 운전을 배워서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닐 것이야.


마지막으로 마음에 드는 두물머리 사진을 투척하고 글을 줄인다.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나 참 그게 어려웠는데 드디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들을 찍고 프로페셔널 사진가가 되어야 하나 잠시 고민도 했다.

역시 뭐든지 열심히 하면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늘긴 느나보다.